위대한 여행
사도 바오로의 발자취를 따라 (개정판)
터키에서 이집트까지,
금세기 중동 지역에 관한 최고의 명저!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지중해 지역을 여행하는 이유는 그곳이 그토록 꼭 한 번 가 보고 싶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배경 지역이자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이 시작하고 성장한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숨결이 묻은 역사의 장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성서학자이자 뛰어난 필력을 지닌 저자 정양모 신부는 터키, 그리스,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 이탈리아, 이스라엘, 키프로스 등 사도 바오로의 발자취를, 묵시록의 일곱 교회, 교회 유적지 순례에 성서적, 신학적, 역사 문화적 기초 지식을 제공하면서 거대하고 광범위한 순례의 장면장면을 이 책 안에 펼쳐 놓고 있다.
이 책 『위대한 여행』은 1997년 출간되어 많은 사랑을 받은 바 있다. 저자 정양모 신부는 이미 10여 년 동안 직접 밟아보고 살펴보고 혼신을 담아 쓴 자신의 원작에 그 이후로도 거듭한 여행을 통해 다시 보충과 수정을 더했다. 게다가 새 『성경』과 개정 외국어 표기법에 따라 그 내용을 새롭게 정리하여 개정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세 차례에 걸쳐 광범위한 선교 여행을 했던 사도 바오로! 그의 여행은 그리스도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그래서 지중해 연안국들은 그리스도교 신자건 아니건 모든 이에게 의미 있는 장소가 된다. 이 책의 제목 『위대한 여행』은 그런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이 책 제1-5편에서는 바오로의 발자취를 순서대로 따라가 보는 여행을, 그리고 제6-10편에서는 초대 교회, 사회, 역사, 지리, 문화적으로 유서 깊은 관련 지역들을 돌아보며 곳곳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이 책 『위대한 여행』은 저자의 깊은 신학적•성서학적 통찰을 통해 성경의 세계와 지중해 문화를 익히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생애를 전하기 위해 그가 걸었던 외롭고 험난했던 길, 그 길을 따라 걸으며 바오로 사도의 고결한 신앙을 만나고 또한 그분의 흔적을 느낄 수 있으리라.
[책 속에서]
타르수스는 641년부터 아랍인들의 침공을 받기 시작하면서 점점 쇠퇴했다. 불행히도 이곳에서 바오로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도심에 ‘바오로의 성문’(일명 클레오파트라 성문)이라는 게 있으나 이는 바오로 시대 이후에 세운 로마식 성문이다. 성문에서 가까운 곳에 바오로 생가 우물이라는 것도 있으나(깊이 38미터) 전혀 신빙성이 없다. 타르수스 시청에서 순례자들을 끌어들이려고 어느 부잣집 우물에다 그런 딱지를 붙였을 뿐이다.
인걸은 간데없지만 예나 지금이나 치드누스 강물만은 무심히 흘러 16킬로미터 지점에서 지중해와 합류한다. 타르수스의 중앙에 자리 잡은 울루 모스크Ulu Camii는 성 바오로 주교좌 성당 터에 세운 것이다. 아다나에서 타르수스로 달리다 보면 타르수스 못미처에 치드누스 강이 흐르고, 강을 건너면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 만든 다리 일부가 있다.
-‘그 유명한 도시 타르수스’ 중에서
사도 바오로는 제1차 선교 여행 때(45-49년경)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어 여기서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선교했다(사도 14,1-7). 제2•3차 선교 여행 때 사도 바오로가 다시 이코니온을 찾아봤다는 명시적 기록은 없으나 재차 삼차 방문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참조: 사도 15,41-16,1; 18,23). 11세기에 셀주크 투르크인들이 코니아를 수도로 삼아 셀주크 제국을 세웠다. 13세기에 이슬람 신비주의자 루미Mevlana Celaleddin Rumi(1207-1273년)가 여기서 이슬람 신비주의를 크게 선양했다. 그에 의하면 정신없이 빙글빙글 사마 춤을 추다 보면 비몽사몽 간에 알라를 느낀다는 것이다. 코니아의 유적은 죄다 셀주크 제국 및 메블라나 신비주의와 관련된 것들이다.
시내 한복판 셀주크 궁성 옛터(지금의 알라딘 파르키) 둘레 도로 남쪽에 1910년에 지은 성 바오로 성당이 있다.
-‘셀주크 제국과 메블라나 신비주의의 이코니온’ 중에서
바오로가 유럽 땅에서 입교시킨 첫 번째 교우 리디아는 티아티라 출신이요 자색 옷감 장수였다고 하는데, 티아티라는 자색 옷감 생산지였다. 당시 자색 염료는 고둥 또는 꼭두서니 뿌리에서 얻었기 때문에 소량으로만 생산되어, 자색 옷감은 매우 값진 고급 옷감이었다. 아울러 리디아는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다고 하는데, 이는 핏줄로는 이방인이지만 종교적으로는, 비록 유다교로 개종하지 않았으나 유다교에 동조하는 부인이었다는 뜻이다.
필리피 교우들은 물심양면으로 바오로를 도왔다. 바오로는 원칙적으로 교우들의 물질적 도움은 사양했지만(1코린 9,4-18; 1테살 2,9) 필리피 교우들의 물질적 도움만은 기꺼이 받아들였다(필리 4,10-20; 참조: 2코린 11,9). 그들만은 바오로의 무사무욕한 본심을 늘 믿어 주었기 때문이다. …… 필리피 교우들 중 누가 사도 바오로를 물심양면으로 돕는 데 앞장섰는지 기록은 없으나 리디아가 그 일을 떠맡았다고 여겨진다. 언젠가 이 몸이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영체靈體(=얼 나)가 되는 날 꼭 만나 보고 싶은 여인이다.
-‘필리피에서 유럽 교회가 시작되고’ 중에서
바오로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아래쪽에 있는 나지막한 바위 언덕 아레오파고스(그리스어로는 Areios Pagos)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설교했더니, 문화 시민들이 비웃고 단지 몇 사람만 귀의했다고 한다(사도 17,16-34). 그러니까 바오로의 말이 문화 도시에서는 먹혀들지 않았던 것이다. 실라스와 티모테오가 베로이아에서 아테네로 내려오자 바오로는 티모테오를 테살로니카 교회로 올려 보내고 자신은 실라스를 데리고 남쪽으로 89킬로미터 떨어진 코린토로 내려가 무려 18개월 동안 머물면서 대대적으로 선교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문화 도시 아테네에서의 실패’ 중에서
바오로는 58년 초에 코린토 교회로 가서 모처럼 석 달가량 휴식하는 동안에(사도 20,3) 자신의 신앙관을 총정리하여 글로 썼다. 그것이 바로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이다. 장차 로마를 거쳐 스페인에까지 가서 선교할 계획을 세웠던지라(로마 15,22-29), 미리 로마 교우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필리피 교회로 북상하여 파스카 축제를 지내고 네아폴리스(지금의 카발라)에서 배를 타고 알렉산드리아 트로아스에 이르러 이레 동안 그곳 교우들과 함께 지냈다(사도 20,6-12). 바오로는 알렉산드리아 트로아스에서 아쏘스(지금의 베람칼레)까지 67킬로미터는 걸어갔다. 아쏘스에서 다시 배를 타고 에페소를 지나쳐 밀레토스 항구에 정박했다(사도 20,13-16).
-‘코린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다’ 중에서
그런데 이처럼 융성한 마리 왕국이 어떻게 망했을까 궁금하다. 마리의 마지막 임금 짐리림이 바빌론의 임금 함무라비를 지지하다 말고 함무라비의 숙적인 에쉬눈나Eshnunna의 임금을 편들었다. 이에 함무라비는 먼저 에쉬눈나를 점령하고 나서 기원전 1761년 마리를 초토화했다. 그 이후 진흙벽돌로 건설된 마리는 사막의 먼지가 날아와 쌓인 흙 속에 묻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러다가 1933년 현지 유목민들이 시신을 묻다가 발견한 조상彫像이 프랑스 고고학자 앙드레 파로의 눈에 띄어 그해부터 지금까지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끝으로 성경과 관련시켜 본다면, 기원전 1800년경 아브라함이 유프라테스 강 남부에 있는 우르를 떠나 강 북부에 있는 하란으로 이주할 때 지리적으로 보아 마리 왕국을 통과했을 법하다. 마리의 발굴로 우리는 아브라함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 상황을 전보다 훨씬 잘 알게 되었다.
-‘마리와 두라유로포스’ 중에서
다른 ‘기둥 성인’ 다니엘의 일화는 다음과 같다. 다니엘은 409년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 자리 잡은 사모사타(지금의 터키 삼사트) 근처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부모가 그를 인근 수도원에 입회시키려고 했으나 수도원장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 열두 살에 수도원에 입회하여 25년간 조용히 지냈다. …… 세월이 흘러 그의 나이 51세 때, 시메온의 제자 한 사람이 다니엘을 찾아와 시메온이 귀천했다는 부음을 전하며 시메온이 입던 망토를 주고 떠난다. 그 순간 다니엘은 기둥 꼭대기에서 사는 성소를 받았다고 확신하여 콘스탄티노플 성 밖, 에냐시아 국도변에 4미터 남짓한 돌기둥을 세우고 그 꼭대기로 올라갔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이 놀라운 현상을 구경했는데, 그중에는 콘스탄티노플 시장 키루스도 있었다.
레오 1세 황제(457-474년 재위) 역시 그를 존경한 나머지 같은 높이로 돌기둥 하나를 더 만들어 선물했다. 돌기둥 두 개 위에서 사는 게 한 개 위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전하고 편했던 것이다. 또한 황제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게 명하여, 다니엘에게 사제품을 베풀라고 했다. 총대주교가 다니엘을 사제로 서품하자면 안수를 해야겠기에 사다리를 가져오라고 명했으나 다니엘은 참겸손인지 거짓 겸손인지 한사코 사제직을 사양했다.
-‘시리아 그리스도인들의 최대 순례지 칼라아트 세만’ 중에서
기원 전후로 하여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 북서부 지역에서부터 시리아 남부 지역 사이와 이스라엘 남부 지역 네게브 사막에 살던 아랍 유목민들을 일컬어 나바태아인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기원전 4세기부터 사해 남동부에 자리 잡은 천연 요새 페트라에 모여 살면서, 사우디아라비아산 향료를 사서 지중해 각지로 내다 파는 중개상들을 상대로 징세도 하고 손수 중개상을 하기도 했다. 이들은 중동 사막의 유목민들 가운데서는 비교적 빠른 기원전 2세기에 페트라를 도읍으로 삼아 나바태아 왕국을 세웠다. 갈라티아서 1장 17절에서 바오로는 자신이 개종한 다음 아라비아에서 선교했다고 말하는데, 여기 아라비아는 나바태아 왕국을 가리킨다.
-‘나바태아인들과 나바태아 왕국’ 중에서
차례
제1편
바오로의 출생 및 회심
그 유명한 도시 타르수스 12
회심의 다마스쿠스 17
제2편
바오로의 제1차 선교 여행
해외 선교의 거점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28
비너스 탄생의 섬 키프로스 37
페르게에서 마르코는 돌아서고 42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45
셀주크 제국과 메블라나 신비주의의 이코니온 50
제자 티모테오를 만난 곳 리스트라 54
황제 송덕비로 알게 된 데르베 59
아탈리아 62
제3편
바오로의 제2차 선교 여행
갈라티아 지방, 그리고 터키 수도 앙카라 66
목마의 항구 트로아스 70
유럽의 첫발은 네아폴리스에서 74
필리피에서 유럽 교회가 시작되고 77
필리피의 첫 그리스도인 리디아 부인 83
테살로니카와 베로이아 87
문화 도시 아테네에서의 실패 94
눈물을 흘리며 코린토 교회에 편지를 쓰다 105
제4편
바오로의 제3차 선교 여행
문이 활짝 열렸다는 에페소 120
목화성 히에라폴리스 135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라오디케이아 138
자그마한 폐허 언덕 콜로새 141
코린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다 146
제5편
바오로의 로마행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압송되다 158
제6편
터키 문화 탐방
요한 묵시록의 일곱 교회 174
알라한 수도원에서 생긴 일 191
삼총사 교부의 카파도키아 194
맨 첫 번째 공의회가 열린 니케아 203
양성 교리를 선포한 칼케돈 공의회 210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216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제4차 십자군 233
콘스탄티노플 마지막 날 237
제7편
그리스 문화 탐방
메테오라와 델포이 242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250
제8편
시리아 문화 탐방
마리와 두라유로포스 256
알파벳의 요람 우가릿 266
시리아 그리스도인들의 최대 순례지 칼라아트 세만 272
고고학계의 중대 발굴지 에블라 279
벨 신전이 있는 사막의 폐허 팔미라 281
제9편
요르단 문화 탐방
디본·메드바·암만 286
나바태아인들과 나바태아 왕국 294
느보 산과 마케루스 요새 300
그리스식 열 도시 데카폴리스 307
제10편
이집트 문화 탐방
유일신 아톤을 섬긴 파라오 아크나톤 312
이집트 탈출 시대의 파라오 라메세스 2세 319
그리스도교 신학의 발상지 알렉산드리아 325
시나이 산과 가타리나 수도원 330
시나이 사본 발견 이야기 337
부록
바오로의 생애 342
바오로의 사상 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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