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복음’에
흥미진진하게 다가가는 책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셨을까?’라는 물음은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계셨을 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교회 학자들과 교부들 또는 역사학자들에 의한 연구만이 아니더라도 끊이지 않고 제기되는 물음일 것이다. 그리고 그 무수한 연구만큼이나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서도 무수히 많은 해석들이 제기된다. 다행히 가톨릭 교회는 보편적인 기준을 두어 교리의 확실한 기준을 잡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처음의 질문에 갈증을 느끼고는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정말 어떤 분이셨을까?”
생활성서사의 신간 도서 『양승국 신부의 흥미진진 성경 읽기』의 저자 양승국 신부는 예수님을 ‘아재 개그’를 유창히 구사하시는 분, 탁월한 유머 감각의 소유자, 오늘날 계셨다면 어깨를 툭 치시며 부족한 죄인인 우리와 소주잔을 주고받으며, 밤늦도록 어깨동무하고 노래를 부르시는 분이셨을 것 같다고 한다. 그러한 예수님이시기에 복음서 내용의 이면에는 예수님의 유머와 즐거움 그리고 따뜻함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양승국 신부는 특유의 재치와 예화에 예수님의 복음 말씀을 덧붙여 복음서의 주요 내용을 더욱 쉽고 재미있게 해설해 준다. 성경의 내용에 저자가 생각한 예수님의 유머 감각을 덧붙여 성경의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고 친숙하게 전달한다.
양승국 신부는 이 책을 통해 예수님 말씀을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신앙을 삶으로 이어갈 수 있는 데 도움이 되는 묵상과 풀이 또한 제시해 준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기쁜 소식, 즉 복음이 우리 일상에서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가깝게 느껴져야 할 것이다. 이 말씀이 진정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기 때문이다. 복음은 결코 우리 삶과 동떨어지고 허황된 상상력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뿜어져 나오는 말씀이고, 복음이 흥미진진하게 우리의 삶에 다가온다면 예수님의 말씀 역시 더욱 맛깔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저자는 “우리 교우들이 좀 더 흥미진진한 마음으로 복음서를 펼쳤으면 하는 바람으로”(9p), “성경을 좀 더 편안하고 재미있게 읽고 묵상할 수 있는”(13p) 은총이 닿기를 바라며 이 책을 썼다고 고백한다.
힘들 때 문득 돌아보면
항상 곁에 계셨던 예수님
세상이 과거와는 달리 팍팍해졌다고 여기고 그 안에서 고립감을 느끼는 개인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과거에는 가족과 친구 혹은 학교나 직장의 선후배 관계 등에서 지지와 연대의 긍정적인 기운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관계가 주는 안정감을 다른 것에서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 이는 점점 깊어져 가는 개인주의적 성향과 함께, 신뢰와 공감을 기반으로 기대거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현실과도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삶이 지치고 힘겨워 문득 돌아보니 아무도 곁에 아무도 없을 때가 있다. 그것은 오늘날의 가벼워진 관계의 비중을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다. 하지만, 곁에서 어느 누구의 온기도 찾지 못해 슬프고 외롭던 순간에도 항상 곁에 머물러 준 이가 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셨다.
복음서의 예수님은 많은 이들 앞에 나타나셨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가려한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이 있었고, 예수님이 민중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킬까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로마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종의 죽음을 막기 위해 살려 달라 청하던 로마군 백인대장 곁에,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 또는 사랑하는 이를 죽음의 저편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이들 곁에도 예수님은 등장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이어진 오늘날, 예수님은 이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곁에 현존하신다. 그것도 가장 친근한 모습으로.
“우리의 하느님은 이처럼 따뜻하고 친근한 분이십니다. 우리와 멀찍이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라 키 작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키를 낮추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낯설어할까 봐,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신 겸손의 메시아이십니다.”(p.8).
복음서에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는 구약 성경의 주인공인 하느님처럼 엄하거나 냉정한 심판자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하느님 아버지의 계명을 ‘서로 사랑하라.’라는 단 하나의 계명으로 축약해 주신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행동으로 그 사랑을 실천하셨기 때문이다.
『양승국 신부의 흥미진진 성경 읽기』에서 저자는 이런 예수님을 사랑과 자비가 가득하신 분, 온유하신 분이신 동시에 우리들에게 친숙하고 ‘아재 개그’를 하며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로 다가오시길 원하시는 ‘메시아’라고 한다. 마치 우리가 항상 우리 곁에서 가깝게 머물며 의지할 곳이 되어 주길 바랐던 그 누군가처럼, 양승국 신부는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분이시며, 마음껏 기대고 머물고 투정도 부려 보며 곁에 계신 예수님을 만끽하라고 우리에게 권한다.
교황님, 성인들의 이야기와
함께 읽는 흥미진진한 성경 읽기
성경과 예수님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쉽고 재미있게 전하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때로는 그 과정에서 내용의 본질보다 재미만을 강조하다 보면 독자에게 예수님뿐만 아니라 신앙이나 교리 또한 잘못 이해할 수 있는 소지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런 오해나 그릇된 정보의 전달을 막기 위해서는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내용도 독자에게 충실히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양승국 신부는 단순히 자신의 생각과 묵상만으로 성경을 설명하고 풀이하지 않는다. 그 묵상과 해석에는 자신이 겪은 일상에서의 소중하고 감동적인 체험과 복음서의 이야기를 담아 성경을 풀이하지만, 이에 더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회칙, 예로니모와 돈 보스코 성인 등 교회의 공신력을 지닌 문헌이나 어록 등을 차용하여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에 교리적 내용 또한 웅숭깊게 다루고 있어, 복음을 쉽고 재미있게 서술한 이야기에 유익함 또한 소홀히 하지 않았다.
“사목자들은 유머를 잘 구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유머는 우리 사목자들이 주님께 청해야 하는 은총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 저에게 유머 감각을 주십시오.’ 하고 청해야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일례로 프란치스코 교황님 또한 유머 감각의 중요성에 대해 자주 언급하셨다. 그것은 아마도 유머가 사람들의 마음을 딱딱하게 굳게 만드는 긴장을 풀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을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오셨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긴장을 풀어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돌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자기 안에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녹여 주는 일 또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 시대의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 주변에 모여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메시아라고 믿었던 것은 아닐까?
이는 성경에서 예수님 곁에 머문 인물들을 통해서 더욱 자세히 드러난다. 복음서에는 예수님 곁에 머물거나 예수님께 다가간 이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들은 예수님께 친밀함과 따뜻함을 느꼈고 그렇게 그분 곁에 머물며 친근한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도 처음부터 예수님께 호의적으로 마음을 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라고 나타나엘이 필립보에게 말했듯이 예수님은 사람들의 무시를 받던 고장 나자렛 출신이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의 곁에 머물기로 결심한 것에는 예수님의 진심이 마음에 닿을 수 있도록 마음의 긴장을 녹여 준 그 무엇, 바로 예수님의 비장의 무기인 유머와 따듯함이 있지 않았을까?
신앙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예수님은 어떻게 살라고 하시는가?
성경에는 예수님 곁에 머물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탐욕스러운 민족의 배신자였던 세리들의 우두머리 자캐오, 예수님의 친구라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비난했던 ‘먹보요 술꾼, 창녀들과 죄인들’, 예수님의 막역지우莫逆之友 라자로와 마르타 그리고 마리아 남매, 종의 건강을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백인대장, 자식을 잃은 나인성의 과부 그리고 예수님 곁에서 언제나 머물겠다고 다짐했던 사도들. 성경에 등장하는 이들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가져가야 할 삶의 태도에 관한 매우 중요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마태 15,22) …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 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 …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마귀가 든 딸을 치유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았던 이방 여인에게 예수님은 차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차가운 반응을 보이신다. 그러나 이방 여인은 재차 예수님께 매달린다. 여인의 간절함에 예수님은 딸을 치료해 주셨다. 우리가 익히 성경에서 보아 알고 있던 이 이야기에서 어쩌면 많은 이들의 이방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냉대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승국 신부는 이 이야기의 교훈을 이렇게 전한다.
“이방인 여인이 우리에게 보여 준, 결코 물러서지 않는 담대함, 끝까지 기다리는 인내, 심연의 바닥까지 자신을 낮추는 겸손, 하늘을 움직이는 강한 믿음, 그것이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신앙의 미덕입니다.”(p.184).
예수님 곁에서 머물면서 그분을 따랐던 이들의 삶은 대개 이러했다. 그분께 마음을 열었고, 그분을 향한 믿음이 있었으며, 그 믿음에 기반을 두고 간절한 것을 청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이 청하는 것을 모두 들어 주셨다. 저자는 바로 이 대목에 집중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오늘을 사는 신앙인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오늘날 우리 신앙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꼭 필요한 해답을 건네준다.
“참사랑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극진히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동료들을 향해 활기차게 움직여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에 대해 우리 마음이 냉담하다면 그 사랑은 거짓 사랑에 불과합니다.”(p.156).
예수님 곁에는 많은 이들이 있었고, 그들을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셨다. 예수님의 언행은 그들 모두를 위한 것, 그들 모두에게 향한 것이었다. 복음서에 전해지는 예수님의 수많은 이야기들은 결국 예수님께 사랑을 청하고, 그 사랑을 이웃에게도 전하라는 가르침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오늘날까지 남아 우리 곁에 현존한다. 양승국 신부가 『양승국 신부의 흥미진진 성경 읽기』를 통해 독자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은 예수님 사랑이 빼곡하게 채워진 복음서에서 독자들이 그 사랑에 가닿을 수 있는 쉽고 재미있는 통로였을 것이다. 복음에서 흘러나오는 예수님의 사랑이 이 책의 독자들에게 넘치도록 흐를 준비는 모두 끝났다. 그 은총의 수로를 열어 볼 독자들을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