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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현 성당과 종현(현 명동) 성당을 지은 건축가, 『한불자전(韓佛字典)』·『한어문전(韓語文典)』이 활판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준 인쇄업자, 그리고 뛰어난 외국어 실력으로 외교적인 문제들을 풀어가도록 협조한 외교가로 기억되는 코스트(E.J.G. Coste, 高宜善, 1842~1896) 신부의 전반적인 모습을 담은 『코스트 요한 신부 서한집』이 간행되었습니다.

서울대교구 설정 200주년을 준비하면서 두 번째로 간행된 이 서한집에는 코스트 신부가 직접 쓴 서한과 보고서 외에도 코스트 신부와 관련된 서한들, 선종 애도 편지, 사망 증명서, 약전 등의 자료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서한집을 통해 당시 선교사들 가운데 보기 드물게 2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조선 교회에 봉사하며 리델 주교·블랑 주교·뮈텔 주교 등 세 분의 주교를 보필했고, 교회의 박해와 종교의 자유를 모두 겪은 선교사로, ‘햇살처럼 눈부시고 자상한 성품으로 모든 이의 삶을 환히 비추었다’고 기억되는 코스트 신부의 발자취를 만나 볼 수 있습니다.​


글쓴이 코스트, 으젠느 장 조르주 Coste,Eugene Jean Georges(1842~1896)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한국 이름 고의선(高宜善), 세례명 요한.

1868년 6월 6일 사제 서품을 받고 7얼 15일 홍콩 대표부로 파견되었다. 1874년 상해 대표부 대표를 역임하면서 조선 포교를 청원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이듬해 11월 21일 만주 차쿠(岔溝)로 가서 『한불자전』 필사 작업과 조선어 공부를 병행하였다. 『한불자전』과 『한어문전』을 펴내기 위해 1878년 일본 요코하마로 건너가 인쇄 책임을 맡았으며, 1881년 가을 일본 나가사키에 성서 활판소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한글 및 한역 기도서 등을 출판하였다. 1882년 10월에는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등 순교자 4위의 유해를 나가사키로 이장하기도 하였다.

조선 파견을 자원한지 10년 만인 1885년 11월 8일 조선에 입국하여 나가사키의 성서 활판소를 서울로 이전하였고 성당·주교관·신학교·사제관·수녀원 등 각종 교회 건물의 설계와 시공에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888년 7월 이후 조선에 첫 진출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지도 신부를 맡았으며, 1890년 2월 21일 블랑 주교의 선종으로 직무 대행에 임명되었다. 박해에서 벗어난 한국 교회 발전의 초석을 튼튼히 다진 그는 만년에 고아원에서 어린아이들을 돌보다가 1896년 2월 28일 장티푸스로 선종,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옮긴이 연숙진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불문학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필사본 서한을 판독 번역하는 일을 해왔으며, 현재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일하고 있다.

프랑스 선교사들과 관련한 주요 역서로, 『프티니콜라 신부의 생애』, 차쿠 조선대목구 선교사들의 편지인 『차쿠에서 온 편지(1855~1881)』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