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업 신부가 고난 중에 전하는 참 행복과 희망
이 책은 2014년에 출간된 소설 최양업 「차쿠의 아침」의 둘째 권이다. 최양업 신부는 갖은 고난 끝에, 무사히 귀국하여 12년간 한강 이남 127개 공소를 돌아다니며 사목했다. ‘최양업 신부’ 한 사람이 오직 ‘최양업’ 이란 이유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매년 순회 사목하느라 잠자리에서 눈을 붙인 날이 한 달에 사나흘밖에 안 될 정도로, 그야말로 ‘길 위의 천국’을 위해 애쓰다가 길 위에서 쓰러진 땀의 순교자이며 목자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간월 공소에서 추격자들에게 포위된 순간부터 선종하실 때까지 마지막 9개월에 대한 이야기다.
필자 이태종 신부는, 최양업 신부의 첫 사목지이며 병인 대박해 직후 조선교구청과 조선신학교가 있었던 차쿠에서 사목하고 있다. 코로나 시국으로 잠시 한국에 돌아와 머무는 동안 최양업 신부의 마지막 이야기를 소설로 썼다. 출생지와 사목지까지 최양업 신부와 인연을 맺은 저자는 최양업 신부 시성시복 운동에 발맞춰 그분의 삶을 상기하고 그분께 기도하며, 신자들이 그분의 삶을 따르게 되길, 그리고 일반인들도 최양업 신부를 알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소설을 썼다고 했다.
「차쿠의 아침 마지막 이야기」에 등장하는 최양업 신부는 그 시대의 어려움과 고난 중에 인생의 참 의미를 알아차리고, 지침 없이 참 행복의 길, 희망의 길로 나아간다. 최양업 신부가 처했던 상황과 빠르고 혼란스럽게 흘러가는 이 시대가 다른 것 같으면서도 하나로 겹쳐진다. 그러기에 최양업 신부가 설파한 참된 행복과 희망은 우리 신앙의 좌표가 되고 희망의 별이 되어줄 것이라 믿게 된다.
아울러 최양업 신부의 신앙과 순명 정신, 사목적인 고민들과 안타까움 그리고 박해 시기를 견뎌내는 신자들에 대한 애타는 사랑과 열정이 소설을 읽는 내내 생생하게 다가온다. 또한 소설에서 신앙을 살아가는 교우촌의 모습들을 덤으로 만날 수 있고, 공소가 처한 지형적 특징과 예스러운 이름들을 통해 성지순례에 대한 관심도 커질 수 있을 것이다. 소설 한 편을 통해 최양업 신부와 당시 신자들을 만나고, 우리 신앙을 돌아보자고 권하고 싶다.
[책속에서]
“언양 저잣거리마다 방이 붙었는데, 신부님 얼굴을 완전 빼박었심더.”
“작천정酌川亭 초입도 막혔어예. 덕천德川역에서 나온 역졸에다가 수남리水南里 통인通引(고을 수령의 잔심부름꾼)애들까지 교대로 번을 서는데, 여간 깐깐한 게 아니라예.”
“참말로 이상하구마. 다른 데선 박해가 끝났다는데 여기 간월만, 신부님한테만 우째 정반대로 돌아가네예.”
_20쪽
달은 흡사 둥그런 거울 같아 보인다. 그 밝은 거울에는 내 모습도 들어있는 듯싶다. “최양업 신부, 최구정! 미안해요. 그동안 너무 혹사시켰어. 그리고 많이 고맙소. 이때껏 잘 따라와 주어….” 둥그런 달빛 거울에는 대건 신부의 얼굴도 내비쳤다. 그가 입을 열어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곳에서야 죽을 수 있나? 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만 ‘그때 나에겐 너라도 남아있었지. 이제 유일한 조선인 사제마저 잃는다면 당장 신자들의 성사聖事(구원 은총을 얻는 일곱 가지 예식)는 누가 돌보냐?’고 하는 듯싶다.
“그래, 그렇다! 한양으로 가자. 기필코 간월을 탈출하자. 주교님께 연례 보고도 해야지. 또 천주께서 허락하신다면 이번에 못 간 공소들에도 가야지.”
_33쪽
우리가 오르려는 길은 길이 아니었다. 양쪽이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난, 말하자면 마른 폭포 위였다. … “신부님!” 수십 길 아래의 저승골 바위에서 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너 가별이 아이가? 뭔 일이고?” …
“포졸이 덮쳤습니다. 근데, 신자들은 안 잡아가고 아버지 말씀으론 그간 미심쩍었던 외교인들만 잡아갔대요. 두 명을 의심했는데 잡혀간 사람은 네 명이나 된다고 하셨습니다. 빨리 가서 전해드리라 해서요!”
_203. 207쪽
선종善終이라. 매 순간순간을 치명하듯 살다가 맞이하는 선종도 있다. 그것은 마치 가을의 낙엽과도 같을 것이다. 봄 여름 내내 최선을 다하고 ‘이제 다 이루었다’는 듯이 가뿐가뿐하게 떨어지는 회귀回歸의 길이다. 나는 순교하고 싶어도 순교할 수 없는 몸이었다. 유일한 조선인 사제라는 이유다. 조선교회에 봉헌된 자로서만 만족해야 했다. 봉헌된 자는 봉헌 받은 분의 뜻대로 사용되면 족할 뿐이다. 나를 기다리는 120여 개 공소의 신자들 앞에서 언감생심, 얻고 싶어도 얻을 수 없는 월계관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조선 땅에도 박해가 끝나고 순교도 사라질 것이다. 그런 날이 오면 매일매일을 치명하듯 사는 일상이 쌓여, 마침내 도달하는 선종이야말로 순교의 월계관에 비견할 만하리라.
_219쪽
염병? 그렇다면 뒤에서 쫓아오는 이 장티푸스와 앞에서 가로막은 콜레라 사이에, 좌우로 임태영과 신명순이 쳐놓은 그물이 조여드는 형세였다. 갑작스레 숨이 막혔다.
_325쪽
분홍 구름은 움직이고 있었다. 끊임없이 변하는 중이다. 대건의 구름이 사라진 언저리였다. 아, 나는 그 자리에 그냥 스러지기로 한다. 더는 찾을 다른 대상도 없이 내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한다. 육신은 물론 영혼의 미동까지 그만하려고 한다. 대건의 구름 대신 만들어진 형상은 성모자상聖母子像이었다. 내가 그 품에 안기고자 한다. “예수! 마리아!” 저를 받아주소서.
_442쪽